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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이야기-손대현 옻칠장] 자개빛깔에 이끌린 소년, 명인으로 태어나다
제목 [명인이야기-손대현 옻칠장] 자개빛깔에 이끌린 소년, 명인으로 태어나다
작성자 나누리 (ip:)
  • 작성일 2013-03-05 16: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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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옻칠장 수곡 손대현 선생이 처음으로 제작한 나전칠기

       상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짓고 있다.

 

 

 

손재주 남달라 어려서부터 생활용품 직접 만들어

무역회사 근무 중 칠공방서 본 작품에 마음 뺏겨

 

민종태 선생 스승으로 모시려 현대판 '삼고초려'

성실함 인정받고 전통옻칠 배우며 독립 준비해

 

 

 

조개는 바닷속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을 지나며 겪은 인고의 산물로 우리에게 진주를 선사한다. 이 진주는 아름다움 속에 아픔과 고통의 눈물을 담고 있어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양에서는 이 오색찬란한 조개껍데기를 사용해 칠기를 장식했다. 영롱함과 오묘한 기품이 흐르는 '나전칠기'는 세계인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이 나전칠기 분야의 정점에는 대한민국이 있다.

 

지난달 29일, 기자는 경기도 광주를 찾았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곤지암터미널에서 다시 차를 타고 15분여를 더 가니 산자락과 맞물려 고즈넉이 자리 잡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옻칠장인 수곡 손대현 선생의 공방이 나타났다.

 

◆자개 빛깔에 매료돼 공방서 옻칠 시작

 

어려서 무역회사에 다니며 심부름을 맡아 일했던 손 선생은 회사와 같은 건물에 있던 칠기공방으로 자주 발걸음을 옮겼다. 쟁반과 같은 작은 작품을 주로 만들던 공방이었는데 자개빛깔이 유독 그의 눈길을 끌었다.

 

"작품에 장식된 자개 빛깔이 눈에 띄었고 아름답게 보였어요. 그 빛깔에 마음을 뺏겨 공방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칠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가 1964년이었으니까 14, 15살 무렵이었어요."

 

옻칠을 배우기 시작한 손 선생은 당시 옻칠로 유명한 장인들의 소식을 많이 듣게 됐다. 당시 김봉영 선생, 김태휘 선생, 민종태 선생이 옻칠의 대가로 꼽히는 이들이었다.

 

1936년 나전칠기의 명인 전성규 선생 밑에서 칠을 시작한 민종태 선생은 1940년 조선미술전 특선에 입상하고 같은 해 조선수출품전시회 최우수상을 받는 등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다.

 

활발한 활동 덕분에 칠공예 분야에서 많이 알려져 손 선생 역시 민종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다. 이야기를 듣는 횟수가 더해지면서 손 선생 마음에는 민종태 선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승 모시기 위한 현대판 '삼고초려'

 

칠공예의 대가로 꼽히는 이는 여럿 있었지만 손 선생의 마음은 한길이었다.

 

"민종태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어요. 활동도 많이 하셨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 소식이 7번 정도 들려오면 민 선생님의 소식은 10번 이상 들었던 것 같아요. 귀에 자꾸 들리니 친근감도 느껴지고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는 혼자 마음속 스승님으로 여겼던 것 같아요."

 

민종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작정한 손 선생은 그 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스승은 쉽게 문을 열지 않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수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민종태 선생에게 그는 눈에도 차지 않는 사람이었다. 단지 '일하는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왔나 보다'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스승님 수하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고 2년 동안은 새로운 옻칠을 배운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무조건 열심히 했어요. 힘든지도 몰랐어요. 겨울엔 남보다 일찍 출근해 난로에 불을 지펴놓고 청소를 했어요. 또 밤에는 옻칠이 마르지 않을까 해서 물도 뿌려놓곤 했죠."

 

공방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했던 손 선생은 2년간 부지런하게 몸을 놀렸다. 이런 모습을 눈여겨본 스승은 성실한 제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적이 없던 민 선생은 제자인 손선생을 옆에 두고 조언도 하고 직접 제작 과정을 봐주며 옻칠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후 결혼을 하면서 독립을 하게 된 그의 자립을 도운 것 역시 스승이었다. 민 선생은 자신에게 들어온 주문물량의 70%가량은 밑작업을 제자인 손 선생에게 맡겼다.

 

"스승님은 겉으로 표현은 많이 하지 않으시지만 세밀한 것까지 신경써주셨어요. 스승님댁 방 한 칸을 내주시고 밑작업을 맡기셨을 때도 집안일 하는 사람을 시켜 세끼 밥을 작업실까지 가져다주라고 하셨죠. 그때는 당연한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자식같이 여겨주셨던 스승님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전통의 소중함을 깨닫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한국의 나전칠기는 칠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이었다.

 

손 선생의 스승 역시 일본으로 작품 수출을 많이 했다. 해외에 수출하는 작품이지만 기술과 문양은 우리의 것을 고수했다.

 

"일본 바이어가 와서 다기 주문을 의뢰하며 오동잎이 그려진 일본 전통문양을 샘플로 가져왔어요. 그걸 보신 스승님께선 일언지하에 주문을 거절하셨어요. '일본 문양이 아닌 우리 문양을 넣어 작업해야 승낙하신다' 고 말씀하셨죠. 주문을 맡긴 일본 바이어가 와서 완성된 작품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작품을 받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감동했죠."

 

스승은 항상 손 선생에게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우리 문화와 숨결이 담겨 있는 것을 해외에 선보여야 한다" 고 당부했다. 외국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문양을 가지고 작업한다면 우리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 전통문화와 문양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수곡 손대현 선생이 재현한 고려시대 유물 '대모나전국당초문염주합'

 

 

◆나전칠기, 세계에 알리다

 

독일의 명차 'BMW' 측에서 한국의 장인에게 작품을 맡기고 싶다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으로 요청해왔다. 여러 명의 장인이 추천됐고 손 선생도 추천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BMW 측에서 샘플제작 의뢰가 들어왔어요. 가지고 온 디자인은 모자이크 같은 현대미술적인 거였죠. 저는 '이왕이면' 한국적인 문양을 넣는 것이 좋겠다' 는 생각을 했고 우리 전통 문양 몇 가지를 넘겨줬어요. 그중에 선택된 것이 모란당초문양이었죠."

 

작품을 본 BMW는 나전으로 장식한 내부를 보고 퀄리티기 기대 이상이라며 극찬했다. 나전칠기 작품이 내구성 등 내부 테스트에도 모두 통과하자 본사에서는 대량생산의사도 전해왔다.

 

수공예 작업인지라 기한에 맞춰 물량을 생산할 수 없어 진행은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 전통공예를 독일에 알릴 좋은 기회가 됐다.

 

손 선생은 한국의 기업과도 많은 작업을 진행했다. 삼성이 개발한 102인치 PDP TV에 일본 유명 전자업계 CEO 영문 이름을 나전칠기로 작업해 선물했다. 또 중동 부호에게 수출할 물량에도 나전칠기 작업을 해 우리 전통의 고급스러움을 담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일본 천황에게 전달할 선물로는 '喜(기쁠 희)' 자가 두개 들어가 '쌍희' 라고 부르는 우리 전통문양에 학이 어우러진 보석함을 만들었어요. 노태우 전 대통령 유럽순방 때 7개국 수상에게 선물했던 나비당초문양의 서류상자도 기억에 남네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영국 엘리자베스여왕 방한 대 제작했던 작품이에요. 나전을 실처럼 가는 끈 문양으로 십장생을 화려하게 싼 작품이었죠."

 

◆미래의 전통 만드는 것이 장인의 몫

 

현재 손 선생은 한국문화의 집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다. 이들은 옻칠에 관심이 있고 직접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이곳을 통해 그는 제자도 만났다.

 

"2년간 강의를 들었던 30대 젊은 친구들이 정식으로 옻칠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좋은 인연이죠. 아들도 대학에서 옻칠을 전공하고 뒤를 잇기 위해 일을 배우고 있고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니 지켜볼 생각이에요,"

 

나전칠기의 기술은 이미 고려시대에 정립됐다. 지금은 전통공예인 나전칠기가 그때에는 파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날의 전통은 과거의 장인이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만들어 낸 작품은 몇 천 년이 지나면 고루한 전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작품이 보존될 수 있게 만들어 낸다면 빛나는 전통이 되지 않을까.

 

"현대적으로 바뀌는 것은 좋지만 유행을 타듯 금방 망가지거나 스러져 버릴 작품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 전통 기법 그대로 자신의 마음에 만족스럽게 제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 장인의 의무이고,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시대 장인의 작품이 오늘날 전통이 된 것처럼 손대현 선생의 작품이 수천 년의 세월 후에 전통이 되길 기대해본다.

 

 

 

출처: 2013.02.12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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